2026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

전통과 환영

 Tradition and Illusion

번뇌의 구름너머, 

찬란한 환영의 정원을 거닐다.

 

전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박제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이어져 온 삶의 리듬이자 결코 끊어지지 않는 생명의 맥박입니다. 올해의 전시 <전통과 환영-이을 련(連), 맺을 결(結)>은 종가의 숭고한 예(禮)가 서린 유물과 후손인 작가의 치열한 내면적 에너지가 만나는 격정적 조우의 현장입니다. 

 

전시의 첫 장은 과거와 현재가 조우하는 접점, ‘이을 련(連)’이라는 화두로 문을 엽니다. ‘잇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형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뿌리 위에 오늘의 고민을 겹쳐내는 정직한 분출입니다. 두 번째 장 맺을 결(結)은 이토록 묵직한 마침표이자, 새로운 생명을 틔우기 위한 찬란한 매듭입니다. 14대손으로서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가는 작가에게, 전통은 조상이 물려주신 거대한 줄기이며, 작가의 예술은 그 줄기에서 뻗어 나와 화려하게 터져 나오는 환영의 빛이자 꽃망울입니다.


작가의 작업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저마다의 울림이 있다”는 실존적 자각에서 시작됩니다. 작업실이라는 공간에서 홀로 흙을 만질 때, 그는 물질의 감각을 넘어선 기묘한 전율과 마주합니다. 수천 년의 시간 속에 잠들어 있던 생명의 기억이 작가의 의식을 빌려 스스로 형상을 찾으려는 움직임, 그것은 보이지 않는 차원의 영(靈)을 이 지상으로 초대하여 물질의 육체를 입히는 경건한 '현신의 의식‘입니다. 붓질이란 들리지 않는 존재의 진동을 받아 적는 필사(筆寫)이며, 흙을 빚는 행위는 보이지 않는 근원의 에너지를 형상화하는 치열한 예술적 응답입니다. 

 

작품 속 무수한 점과 선들은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정교한 그물망이며, 흙의 결을 한 겹씩 쌓아 올린 도조(陶造) 작업은 흩어지는 생명력을 응집하려는 정성의 결정체입니다. 고통을 창조로 승화시키는 연금술 속에서, 흙을 가마에 넣고 견디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불로 단련하는 과정이었으며, 캔버스 위를 자유롭게 비상하는 ‘푸른 새’는 세상의 소란함을 뚫고 솟구쳐 마침내 마주한 내면의 가장 맑고 강인한 환영입니다.

 

이번 전시는 박물관 소장품 속 '지켜온 실재'와 그 틈에서 꽃피운 '오늘의 숨결'이 나누는 대화의 장입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전통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가? 아니, 전통은 오늘날 우리의 번뇌를 씻어내고 다시 삶을 살게 하는 치유의 힘이 아닌가? 종가 유물의 엄숙함과 묘한 생명력을 지닌 작품들이 공명하는 이 공간은, 우리 각자의 마음을 덮고 있는 구름을 잠시 걷어내고 내면의 찬란한 정원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작가의 작업은 고통의 중력을 이겨낸 새의 날갯짓을 닮아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비상이 아닙니다. 가장 낮은 흙 속에서 빚어 올려, 가장 높은 환영의 하늘로 띄워 보내는, 묵묵하고도 정직한 존재의 증명입니다.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닭은 갑옷을 입고 있고, 코뿔소는 묵묵히 대지를 딛고 서 있습니다. 그 닭은 세상을 향해 뾰족하게 날을 세웠던 젊은 날의 작가 자신이요, 코뿔소는 전통이라는 거대한 무게를 짊어지고도 제 길을 잃지 않는 지금의 그입니다. 작가는 흙을 빚어내며 내면의 폭발하는 에너지를 현실의 형상으로 길들입니다.


상처라는 실재는 삶의 이면에 어둠으로 존재하지만, 그 굴곡을 에너지로 삼아 빚어낸 예술은 경계 너머의 빛을 머금고 찬란한 숲을 일굽니다. 이 숲은 흩어진 기억을 잇고 깨어진 시간을 맺으며 비로소 완성되는 성소(聖所)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정갈한 숲을 거닐며, 상처가 어떻게 예술이라는 생명력을 얻어, 작가의 내면을 울리던 그 고귀한 진동과 하나가 되어 찬란하게 숨 쉬는지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흙의 무게와 환영의 울림이 공존하는 이 터전에서, 푸른 새의 날갯짓을 따라 여러분 각자의 마음속 평온에 닿기를 바랍니다.

 

진현주_학예연구사
 

작가 소개

 

이종혁은 공간의 질서에 대한 사유와 물질을 빚어내는 조각의 언어를 바탕으로, 자신의 내면을 예술로 번역해 온 작가입니다. 그에게 예술은 단순히 형상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흙과 붓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거대한 흐름과 그 내면의 소리를 감각하고 직면하는 치열한 탐구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낯선 토양에서 보낸 유학 시절은 그에게 전환점이었습니다. 언어와 관습이 완전히 차단된 이방인의 공간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자기 내면의 거대한 파동을 처음으로 마주했습니다. 작가는 작업의 근간을 '보이지 않는 힘의 감응(感應)'에 둡니다. 만물에 깃든 생명의 에너지가 흙의 질감과 붓의 궤적을 통해 스스로 드러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가 흙을 다루고 캔버스 위에 선을 긋는 과정은, 들리지 않는 존재의 진동을 자신의 언어로 거침없이 받아 적는 기록이자, 서구적 조형 논리와 동양적 정신세계가 작가 안에서 팽팽하게 조율되는 긴장된 예술적 행위입니다. 

 

헤르만 헤세가 말했듯, “나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던 것”처럼, 작가는 치밀한 구조적 사유와 묵직한 노동을 통해 내면의 목소리를 감각적인 실체로 치환해 나갑니다. 그에게 흙을 한 겹씩 쌓아 올리는 도조 작업과 수천 번의 호흡을 담아낸 붓질은 단순한 창작을 넘어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강력한 분출입니다. 이는 '공명(Resonance)', 즉 작가의 내적 진동이 외부의 물질과 만나 하나의 파동을 이루는 과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불안이라는 소음을 잠재우고 내면의 고요한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흙은 정지된 물질에서 벗어나 생동하는 꽃과 동물로 숨을 쉬고, 캔버스를 채운 터치들은 우주적 리듬을 닮은 파동이 되어 심연을 울립니다. 

 

이원익 종가의 14대손인 이종혁은 조상이 지켜온 전통의 줄기에 현대적 상상력을 접목하여, ‘지켜온 시간’과 ‘피어나는 환영’이 만나는 지점을 탐색합니다. 그는 오늘도 작업실이라는 자신만의 성소(聖所)에서, 보이지 않는 힘의 이끌림을 자신의 의지로 길들이며 흙을 빚고 고요히 획을 올립니다. 상처를 딛고 피어난 환상의 아름다움으로 빚어낸 그의 작업은, 시간의 지층(地層)이 응축된 서사 곁에서 가장 생생하게 깨어나는 지금의 호흡을 당당히 증명합니다.

주     관  충현박물관
총     괄  함금자 관장
자     문  이종혁 부관장
책     임  한은희 학예실장
기     획  진현주 학예연구사
지     원  권민정 인턴
촬     영  안홍범
디 자 인  디자인시선 
행정지원  광명시 문화관광과 
 

후     원 2026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

 

오프닝 리셉션
2026년 7월 10일 오후 12시